티스토리 뷰

네번째 투병일기의 주제는 가족이다. 투병일기에 가족 이야기가 빠질 수 있겠느냐. 라는 생각이다. 일단의 나는 가장이고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이유도 바로 이것이므로...  그러므로 한발짝 늦은 네번째 투병일기의 주제는 가족이다.

 

*

 

나는 살면서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대한 경계가 언제나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불분명한 경계를 때로는 이렇게 결정짓고 또 때로는 저렇게 결정지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가 해야 하는 것과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나를 이끌어준 많은 것들이 있었다. 나의 신념 이라던가 나의 의지 라던가 나의 희망 이라던가 이런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어떠한 결과가 있다. 이 결과가 있기까지에는 분명히 어떠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과정 동안에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반복하며 시시 때때로 어떠한 결정들을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들이 모두가 내가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내린 결정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결정들로 인해 "했던 것"들이 "내가 하고자 했던 것"들이 아니라 내가 "했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말이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난 내가 했어야 하는 일들을 해왔던 것이다. 결혼을 했어야 했고 아이를 낳았어야 했다. 난 그들을 사랑해야 했고, 난 그들을 위해 헌신했어야 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했어야 하는 것"들이였다. 그러나 난 그 했어야 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그것의 이름은 바로 가족이다. 나의 가족. 그리고 난 그 가족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거짓 가장인가. 나는 나를 사랑하므로 나를 위한 일들을 해왔던 것일까. 그러므로 지금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내가 나를 사랑하므로 해왔던 모든 결정들에 대한 결과치가 아닐까. 나는 나를 사랑하므로 언제나 나를 포장하고자 했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갈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나는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 쓸데없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하나가득 담겨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이 모든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나이기에 앞서 나는 내 가족의 가장이고,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며, 나는 내 아이들의 아빠이자 아버지이며 나는 산타 할아버지이고 산타 할아버지였다.

 

*

 

나는 나의 가족을 사랑하므로, 지금의 나는 사랑에 빠져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다" 라고 얘기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가족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왜일까? 가족에 대한 사랑은 그 태생부터가 다르기 때문이겠지. 처음에는 호감이 가다가 차츰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다가 그러다 보니 사랑에 빠져드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마치 태초부터 있었던 것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높고 낮음 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고 밀거나 당기는 거리감 없이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두고두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얘기할때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다" 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겠지. 가족에 대한 사랑은 사랑을 뛰어 넘는 더욱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뜬금없는 영화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영화 한편이 떠올랐다. 스피드 라는 영화다. 남자 주인공은 매트릭스에서도 출연한 유명한 배우이고 여자 주인공또한 매우 유명한 배우이다. 영화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설치한 버스에 두 남녀 주인공이 함께 타게 되었고, 그 버스에 설치된 폭탄은 버스가 일정 속도 이하로 내려가면 폭발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바람에 두 남녀 주인공이 번갈아가면서 미친듯이 버스를 운전해야만 하는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둘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게 된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두 남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게 되서는 애틋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남녀주인공의 키스씬으로 끝난다.

 

얘기하고 싶은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죽을 것만 같았던 힘든 과정을 함께 이겨 내는 것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살면서 죽을 만큼 힘든 일이 많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힘든 일들을 함께 견디고 이겨냈다. 그 과정속에서 서로 부닥치고 다투고 때로는 겨루기도 하고 그러다가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무수히 많은 힘들었던 일들을 함께 견디어 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마치 우리 가족이 걸어온 이 길들이 영화 "스피드"와 같이 폭풍같은 질주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느낌이 그러하다. 내 가슴속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 "스피드"의 남녀주인공이 느끼는 그 사랑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다."

 

*

 

이렇듯 나는 내 가족의 가장이고 이렇듯 나는 내 가족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난 지금 투병중이다.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 다행히 다른 암들보다는 완치율이 높다고 하는 림프종으로 4기 진단을 받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날의 나는 그랬다. 아내를 불렀다. 행여 내가 더 힘들어할까 아주 조금의 말도 아끼고 아껴서 조심하고 조심한 아내였다. 의사를 함께 만나고 병에 대한 설명을 함께 듣고 함께 이해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걸었다. 그렇게 조용히 내 옆에서 함께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묵묵히 함께 하고 있던 아내의 내면을 나는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바라볼 여력이 없었다. 아니 그건 핑계인가. 그 내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소리들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아내는 나와 함께하며 내 옆에서 끝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끝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아내의 그 커다란 존재감이 오롯이 느껴진다. 언제나 그렇게 듬직하게 내 곁에 있어주었고 있어줄 사람이란걸 다시금 느낀다. 그러므로 난 행복하다. 투병중임에도 난 이렇듯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옆에서 이렇게 묵묵히 함께 해주는 한 사람 덕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투병중임에도 고독하다 느끼지 아니하고 오롭다 느끼지 아니하는 이유가 당신 한 사람 덕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


별다른 수술없이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의 시간동안 항암치료를 받는 것이 나의 구체적인 투병의 내용이다. 그 중간중간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고, 그 마지막에 어떠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결코 짧지 않은 험난한 길이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누구보다 더 씩씩하게 이것을 이겨내리라는 것을. 나는 한 가족의 가장이고 나는 한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의지는 이미 병을 이겨내고 건강한 몸을 맞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의 힘이라고 믿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