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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식일까지 D-4, 입원하고 벌써 다섯번의 밤을 보냈고 이곳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한 느낌이다. 좌욕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고, 가글도 열심히 하면서 부작용이 생기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가장 궁금했던 샤워도 했다.  저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샤워를 할 수 있을까 무척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오는 멸균식은 절대로 적응할 수가 없다. 우웨에엑 ㅠㅠ


▲ 저 발판이 샤워부스였어... 심지어 샤워용 의자도 있어 @@;




 이제 4일 후면 내 몸 안에 있던 조혈모세포들은 다 사라지고, 새로운 조혈모세포가 채워질테다. 그리고 내 몸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A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O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겠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새삶이 아닌가. 혈액형이 바뀐다니 흐흐흐.

 나에게 조혈모세포를 기증해 주는 공여자 분은 30대 초반이고 몸무게가 80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분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분의 혈액형이 O형이라고 한다. 혈액을 생산하는 공장 역할을 담당하는 조혈모세포를 기증 받는 이유로 나의 혈액형이 기증자의 혈액형으로 바뀌는 거라고 하니 이 얼마나 신기한가. 

 사실 나는 A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O형이 맘에 들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A형보다는 더 맘에 든다고 할까. 그러니 그 찌질했던 지난 A형의 삶을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O형의 삶을 살아갈테다. 기왕이면 성격도 O형처럼 될려고 노력을 해보는 거야. 쿠후후. 그런데 내 소심한 성격이 뭐 어디 가겠어? 

 독일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혈액형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하더라. 수혈을 해주거나 수혈을 받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혈액형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을 뿐더러 궁금해할 필요성조차 없다는 거지. 그리고 혈액형으로 성격을 나누고 사람을 판단하는 이상한 기준을 갖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군. 그러니 그네들은 혈액형이 바뀌는 것에 전혀 무관심하겠으나,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혈액형이 바뀌는 것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그것도 가장 찌질하다는 A형을 버리고 친화력의 대명사라고 하는 O형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니 말이다. 호호. 

 그렇지만, 혈액형이 바뀐다 하더라도 내 성격이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란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혈액형별 성격은 어디까지나 재미로만 보는거니까. 그렇지만, 앞으로 이것으로 인한 꽤 많은 이야깃 거리가 생겨날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너 이제 O형이라면서 왜 이렇게 소심하게 구는 거야? 너 이제는 그렇게 우유부단하면 안 되는거야! 혹은 내가 A형일때는 이랬는데 O형으로 살아 보니까 이렇더라. 라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지난달에 병동에서 같이 입원했던 분들도 지금쯤 입원을 했을까. 그분들도 이식을 받기 위해 날짜를 기다리는 중이였는데... 어쩌면 저 문밖에 있는 또 다른 병실 어딘가에서 이식 과정을 진행중일지도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처라도 주고 받는건데... 하여간 이 소심한 성격은 어쩔수가 없다. 아 이제 나는 O형이 될 터이니 엄청난 친화력이 생겨날려나? 그래서 연락처를 주고받는 일따위는 아주 간단하게 처리해 버리는 대범한 성격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하. 어쨌거나 그 분들도 힘든 이식과정을 잘 견뎌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밝은 얼굴로 다시 뵐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지난 한동안의 나는 그랬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무겁게 했으며, 무엇이 나의 마음을 그렇게 분노에 휩싸이게 했을까. 나의 기저에는 한동한 순수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순수한 분노라니 지나가던 참새가 웃고 지나갈 얘기다. 그러나 그것을 완벽히 통제했어야 할 나의 이성은 제 본분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 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엿 같은 질병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야 라는 얄퍅한 변명만을 매번 던져댈 뿐이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말들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 무서운 무기들을 너무 쉽게 휘둘러 버렸다. 그렇게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남긴채 나는 이곳에서 은닉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아직은 의사소통이 완벽하지 못한 막내아이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사주는 "베리베리 스트로베리"를 맛있게 먹고 있던 아이는 아빠가 눈물을 보이는 까닭을 알리가 없었을테다. 유치원에 가기 싫어 하는 아이에게 심할 정도로 한바탕 퍼부어 주고서야 그때의 그 분노가 아이로 인함이 아님을 깨닫고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 미안한 마음을 아이에게 전할 길이 없었다. 고작 "베리베리 스트로베리"를 아이에게 사주는 것 말고는.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고함소리와 그 분노는 이미 다른 이유로 내 안에 축적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 때 그 상황에서 다른 말들과 함께 쏟아져 나왔을뿐, 그것이 아내를 향한 내 마음의 전부는 아니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분노를 방출하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았던 걸까.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어마하게 쌓여있던 미안한 감정들이 더욱 많이 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미안한 감정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에는 내 마음속에 있는 이 순수한 분노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 만큼 나는 더 성장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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